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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의미 변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매니지먼트에 관한 대부분 자료에는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부분이 반드시 존재하는데, 1960년대쯤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갖는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세 가지 분야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 사적인 윤리와 공적인 윤리와의 관계
- 노동자에 대한 책임
- 지역 사회에 대한 공헌이라는 의미에서 책임
어떤 공헌이 가능한가
현재 사회에서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 '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종 갈등 같은 사회문제나 환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같은 주제가 중점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대형 제조업체인 ASEA 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이 1960년대 말 아프리카의 대규모 전력 프로젝트에 참가한 일로 비난을 받았다.
원래 이 프로젝트는 UN의 지원과 세계은행으로부터의 융자, 스웨덴 정권을 보증으로 통과했는데 그 목적은 극빈 지역의 생활 수준 향상이었다. 그런데 해당 국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기업들이 식민주의를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가장 강력했던 요구는 1960년 뉴욕 시장인 존 린제이의 성명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뉴욕 소재의 대기업에 흑인 거주 구역의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생활을 하도록 자원과 교육을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매니지먼트에 대한 과신
이러한 요구와 별개로 반응하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 많다. 요구 수준이 높아지는 것과 기업에 대한 적대감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기대를 초래하는 건 기업의 실적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성공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도로 성장한 국가에서는 경제적 성과를 당연시한다. 인류의 1/3을 100년 동안 풍요롭게 만든 경제 성장이 나머지 2/3를 더욱 짧은 기간에 풍요롭게 만들 거라는 예상은 틀림없다. 최소한 급속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생활의 질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성공의 방증이다. 지난 과거에는 생활, 생존에 모든 총력을 기울여야 했던 상황에서 오늘날에는 생활의 질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발전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데 높은 기준치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하기만 할 뿐 불합리할 정도는 아니다. 기대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권위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매니지먼트에 대한 과신이다.정부에 대한 환멸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사람들도 지난 세대까지만 해도 정부가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스웨덴, 독일처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국가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강력한 통제력 있는 정부를 원하는 사람조차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요구하는 이유에는 기업의 매니지먼트가 사회 지도자로 지위를 자리 잡았다는 인식이 있다. 리더로 매니지먼트가 부상한 후 정부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증가하고 삶의 질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기업 활동의 중심에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요구가 커졌다.
과거에는 사회의 가치와 신념, 개인과 사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면서 기업이 직접 나서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자유를 실현하며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사회의 요구에 대해 매니지먼트는 새로운 사고로 행동해야 한다.세가지 사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비엔나 마을
유니온 카바이드사는 창업 당시부터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생산한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동일 지역 내 실업률이 높은 곳에 새로운 공장을 지으려 했다. 작은 마을인 비엔나에 공장을 만듦으로서 마을에 1,500명 인근 탄광에 500~1,000명의 고용 창출 효과를 기대했다. 채산에 한계가 있더라도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생각에 이곳에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당시 기술로 최신의 공해 방지 시설을 보유했다. 무려 75%의 유해 물질을 줄이는 설비를 갖추었다.
1951년 가동을 개시한 공장으로 유이온 카바이드사는 지역사회의 구세주가 되었다. 하지만 10년 후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면서 비엔나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유해 물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1961년에는 환경오염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건 인물이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 공장은 미국 전역에서 악명을 떨쳤다.스위프트 데 아르헨티나
스위프트 데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 최대 정육 공장이었으며 빈곤 지역의 최대 고용주였다. 아르헨티나의 육가공 업은 1950년 이후 점점 쇠퇴일로를 걸어갔다. 1968년 글로벌 기업 델텍이 이 공장을 매입했다. 그 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설비를 근대화했지만, 식육 공장과 사업은 점점 축소되었다. 그동안 다른 경쟁사는 공장을 폐쇄했다. 하지만 델텍은 남미에서 진행 중인 다른 사업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 스위프트 데 아르헨티나를 유지하기로 한다. 인원을 정비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은행 융자까지 받았지만 1971년이 되어도 수익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결국 스위프트 데 아르헨티나는 종업원을 포함한 모든 채권자에 대해 공장 폐쇄에 장기 분할을 통한 채무의 변제를 제안했다. 채권자의 86%가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판사는 이 동의를 무효라고 하고 델텍의 채권자 권리를 부정했다. 델텍이 보유한 아르헨티나 기업의 주식을 모두 압류했다.인종차별과 퀘이커
1940년대 말 미국의 어느 철강회사가 남부 사업부에 새로운 매니저를 임명했다. 그때까지 그곳은 심각한 인종차별이 존재했고 경영진은 모두 남부 출신이었는데 새로운 매니저는 퀘이커 교도였다. 새로운 매니저는 본사로부터 인종차별을 해소하라는 임무를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첫해 매니저는 지역 및 조합의 간부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을 확장하는 새로운 용광로에 인력을 배치하는 자리에서 몇 명의 숙련된 흑인 인력이 임명되었다. 그러자 조합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파업이 시작되었다. 사업부장은 진퇴양난에 빠졌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퀘이커 교도인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대기업의 경제력으로 지역 사회를 지배하려 한다는 생각으로 도움을 거부했다.
사업부장은 회사를 그만두었고 흑인을 배치하는 건 무효화 되었으며 파업은 중지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인종차별에 대해 조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큰 비난을 받았다.'매니지먼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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